
하미 마을,
퐁니・퐁넛 마을에서의
민간인 학살

하미 마을
퐁니·퐁넛 마을
1968년 2월, 베트남 꽝남성의 하미 마을과 퐁니·퐁넛 마을에서
학살이 발생했습니다.
이로 인해 응우옌럽 씨(74)는 가족을 잃었고,
쩐반지엡 씨(72)는 다리에 총을 맞은 채 가까스로 살아남았습니다.

응우옌럽 씨의
이야기
Nguyễn Lập / 하미 마을 학살 유가족
전쟁 당시 어떤 일이 있었나요?
"저는 하미 마을에서 태어나 13살이 되던 해에 일을 하러 다낭으로 떠났어요. 시장에서 반미를 팔아 근근이 생계를 유지했죠.
5년 뒤 1968년, 전쟁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어머니를 찾기 위해 고향에 돌아갔는데 어머니가 보이지 않았어요.
어머니가 다치셨고, 이웃 분들이 어머니를 다낭에 있는 병원에 데려다줬다고 들었어요.
다낭으로 돌아가 다행히 어머니를 만날 수 있었지만, 어머니는 학살 당시 수류탄으로 인해 발목을 잃은 상태셨어요."

다른 가족들은 어떻게 됐나요?

“어머니께 동생들이 어디에 있는지 여쭤보니, 당시 10살이었던 남동생은 사망했고, 5살 남동생은 겨우 살아남아 병원에 실려갔다고 말씀하셨어요. 하지만 일주일 후 작은 남동생도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불발탄 사고를 겪 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네 맞아요. 1975년에 이곳 하미 마을로 돌아와 어머니와 저 둘만 살고 있을 때였어요. 어느 날 논에 묻혀있던 수류탄이 터져 파편이 눈에 들어갔어요. 그 사고로 두 눈의 시력을 모두 잃고 왼손 중지 두 마디 정도가 잘렸습니다. ”

그동안 한국인을
여러 번 만나보셨다고요.

"네, 여러 사람들이 한국에서 이곳까지 찾아와 먹거리와 의약품을 선물했어요. 저는 양쪽 시력을 잃어 아무것도 볼 수 없지만 그들이 전해준 성의는 고스란히 느껴졌어요. 찾아와 주는 사람들이 무척 고맙고 원망하는 마음은 없어요.
위령제가 열릴 때 한국인들이 참석한 적도 있었어요. 그때도 서로 안고 즐겁게 대화했었고, 그들이 밉지는 않았어요."
하미 마을 위령비

하미 마을에서 일어난 학살 이후 2001년, 하미마을에 위령비가 세워졌습니다.
비석의 앞 면에는 사망자 135명의 이름, 성별, 출생 연도가 담겼고,
뒷면 비문에는 한국군이 저지른 학살의 참상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한국의 반발에 부딪혀
현재는 뒷면의 기록이 연꽃 그림으로 덮힌 상태입니다.


쩐반지엡 씨의
이야기
Trần Văn Diệp
/
퐁니·퐁넛 마을 학살 생존자

학살 당시 무슨 일을 겪으셨나요?
“1968년 학살 당시 저는 14살 학생이었어요. 어머니는 막내 남동생을 출산하러 아버지와 병원에 계셨습니다. 저와 할아버지, 그리고 남동생 한 명이 집에 있었는데, 아침 8시쯤 총소리가 들려서 이웃집으로 도망갔어요. 우리 집보다 이웃집이 더 안전하다고 생각했거든요.
곧이어 한국군이 총을 마구 쏘고 마을 사람들의 집을 불태워 많은 사람들이 죽었어요. 그 모든 일이 눈앞에서 벌어졌어요.”


“우리 집에는 물소가 한 마리 있었는데, 총소리에 놀라서 이리저리 움직였어요. 할아버지는 물소를 잡으려고 밖에 나가셨다가 한국군의 총에 맞아 쓰러지셨어요.
할아버지의 비명소리를 듣고 저도 밖에 나갔다가 오른쪽 다리에 총을 맞았지만, 다시 방공호로 돌아가 간신히 목숨은 구했습니다.
한국군이 떠난 후 아버지가 돌아오셔서 상황을 보고 크게 소리치며 빨리 도망가자고 하셨습니다. 그때 남동생이 없어진 것을 알았지만, 언제 다시 총격이 이어질지 몰라 도망치다가 논두렁에서 남동생의 시체를 발견했어요.”
다친 다리는 괜찮으신가요?
“전쟁 때 다리를 세 번 다쳤어요. 처음은 한국군의 총에, 두 번째는 남베트남군의 총에, 세 번째는 미군이 던진 수류탄에 맞았어요.
하지만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 지금은 많이 나아졌습니다.”

한국인을 만났을 때 어떠셨어요?

"코로나19 이전에 여길 찾아온 한국인을 몇 번 만나 약과 과자를 받았어요. 퐁니퐁넛 위령비가 세워졌을 때 한국인과 베트남인이 함께 시간을 보냈고 다시 만나자고 약속도 했는데, 코로나 이후엔 만날 기회가 없어져서 슬퍼요."
한국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전쟁 당시 한국군을 떠올리면 여전히 무서워요. 하지만 지금은 사회가 많이 변했고, 과거는 지난 일이라고 생각해요. 학살을 했던 한국군도 전쟁이라는 상황 때문에 악하게 행동했을 거에요."
전쟁의 상처를 회복하기 위해
한국에서 어떤 노력이 이뤄지면 좋을까요?

한국 정부가 베트남전 당시 학살 사실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이 우선이에요. 그밖에 피해자들이 가장 필요한 것은 물질적 지원이라 생각해요.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많으니까요.
퐁니·퐁넛 마을 위령비
2004년, 한국 시민단체의 지원으로
퐁니퐁넛 마을에 희생자들을 기리는 위령비가 세워졌습니다.
비석에는 당시 희생된 주민 74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